방부제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
화장품에 물이 들어가는 순간 미생물이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세균, 효모, 곰팡이는 수분과 영양 성분이 풍부한 크림이나 로션 안에서 빠르게 늘어납니다. 이렇게 오염된 제품을 피부에 바르면 자극이나 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방부제는 이 미생물이 제품 안에서 자라는 것을 막아 줍니다. 즉 방부제는 제품을 오래 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비자가 안전하게 쓸 수 있게 하는 역할이 더 큽니다. 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순수 오일이나 바셀린처럼 수분이 없는 제형은 방부제 없이도 변질 위험이 낮지만 크림·로션·에센스처럼 물이 들어간 제형에는 방부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파라벤이란 무엇인가
파라벤(paraben)은 파라하이드록시벤조산(para-hydroxybenzoic acid)에서 유래한 성분으로 메틸파라벤, 에틸파라벤, 프로필파라벤, 부틸파라벤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화장품과 식품, 의약품에 두루 쓰여 온 성분으로 효과가 입증돼 있고 제조 단가가 낮아 오랫동안 널리 사용됐습니다.
피부에 닿으면 대부분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어 체외로 배출됩니다. 식약처는 파라벤 단일 성분 사용 시 최대 0.4%, 여러 종류를 섞어 쓸 때는 합계 0.8%를 상한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EU 화장품 과학위원회(SCCS)는 메틸파라벤과 에틸파라벤은 0.4%까지, 프로필파라벤과 부틸파라벤은 얼굴과 손 제품에 한해 0.14%까지 안전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논란의 발단: 2004년 연구
2004년 영국 연구자 필리파 다브르(Philippa Darbre) 팀이 유방암 환자 20명에게서 떼어낸 종양 조직에서 파라벤을 검출했다고 발표했습니다(Journal of Applied Toxicology). 이 연구가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파라벤이 유방암을 일으킨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가 밝힌 것은 파라벤이 종양 조직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파라벤이 암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존재했는지는 이 연구의 범위 밖이었습니다. 비교를 위한 건강한 조직 샘플도 없었습니다. 독성학에서 검출(detection)과 인과 관계(causation)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이후 여러 기관의 검토가 뒤따랐습니다. 파라벤이 실험실 세포 실험에서 에스트로겐과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는 연구도 있지만 화장품에 쓰이는 농도에서 실제 인체 호르몬 체계에 영향을 준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화장품 농도에서 파라벤의 에스트로겐 유사 활성은 우리 몸이 자연적으로 만드는 에스트라디올의 수만 분의 1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요 기관의 현재 평가
논란 이후 각국 기관이 기존 근거를 다시 검토했습니다.
| 기관 | 평가 내용 |
|---|---|
| 식약처(MFDS) | 파라벤 단일 0.4%·복합 0.8% 이내 사용은 안전하다고 판단. 배합 한도를 유지하며 계속 허용 |
| EU 화장품 과학위원회(SCCS) | 메틸·에틸파라벤 0.4%, 프로필·부틸파라벤 0.14% 이내에서 안전 평가. 단 영유아 기저귀 부위 제품엔 사용 금지 |
| 미국 FDA | 기준 농도 내 파라벤이 인체에 해롭다는 증거 없음. 현재 모니터링 계속 중 |
| 미국 피부과학회(AAD) | 파라벤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소비자에게 특별히 피할 근거 없음 |
대안 방부제: 파라벤 대신 무엇을 쓰나
논란 이후 파라벤을 피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제조사들은 다른 방부제를 대신 쓰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쓰이는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 페녹시에탄올(Phenoxyethanol):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대안 방부제입니다. 식약처 허용 한도는 1%이며 그 안에서는 안전성이 입증돼 있습니다. 다만 3개월 미만 영유아 제품은 유럽에서 얼굴에 사용을 권고하지 않습니다.
- 에틸헥실글리세린(Ethylhexylglycerin): 글리세린에서 유래한 성분으로 방부 효과가 있으며 페녹시에탄올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독 방부 효과는 약해 보조 방부제로 주로 씁니다.
- 1,2-헥산다이올(1,2-Hexanediol): 보습 성분이기도 하면서 방부 작용도 함께 합니다. 단독보다는 다른 방부제와 함께 씁니다.
- 안식향산나트륨·소르브산칼륨 조합(Sodium Benzoate + Potassium Sorbate): 식품에도 쓰이는 성분으로 낮은 농도에서도 효과가 있어 비교적 순한 방부 조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자연 유래 방부제: 로즈마리 추출물, 자몽 씨 추출물 등이 쓰이기도 하지만 단독으로 충분한 방부 효과를 내기 어려워 보조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안 방부제도 각자 특성과 주의점이 있습니다. "파라벤 프리"가 곧 무방부제나 더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방부제든 규정 농도 안에서 쓰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라벤 프리" 표기 읽는 법
제품에 "파라벤 프리(Paraben-Free)"가 적혀 있으면 파라벤 계열 성분을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방부제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대부분은 파라벤 대신 페녹시에탄올처럼 다른 방부제를 사용한 것입니다.
전성분표에서 방부제를 확인하려면 성분명 끝에 "파라벤"이 붙는 성분뿐 아니라 페녹시에탄올, 1,2-헥산다이올, 에틸헥실글리세린, 안식향산나트륨 등을 찾아보면 됩니다. 전성분표 읽는 법이 궁금하다면 전성분 표시제와 1% 룰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라벤에 실제로 알레르기 반응이 있거나 의심된다면 피부과에서 첩포검사(패치테스트)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파라벤을 특별히 피해야 할 이유는 현재 과학적 근거에서 명확하지 않습니다. 성분 안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EWG 등급의 오해와 올바른 이해도 함께 읽어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